1.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영국의 이집트 점령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의 스당 전투와 1904년 러일전쟁 기간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집트 점령으로 영국은 인도로 가는 통로를 확보해 동 지중해와 중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이집트의 점령으로 러시아와는 해협에서 대치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할 필요성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이 체결되는 길을 터놓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분할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프랑스와 맺은 공동지배 약속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그로부터 1898년 파쇼다 사건까지 두 나라는 식민지 문제로 크게 대립하게 되었다.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기 전에는 유럽 열강 사이에는 아프리카 문제에 관해 일종의 신사협정같은 것이 있었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유럽 상인들이나 관리들의 분쟁에는 국가들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신사협정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유럽 본국 정부들이 아프리카 현지 분쟁에 직접 개입하게 되는 이른바 아프리카 대륙의 유럽 정치화 시대가 열렸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지원이 필요하였고 독일은 그들 나름대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의 해외경영을 적극 지원한 것은 프랑스로 하여금 알자스-로렌을 잊게 하려는 의도와 함께 영국과 대립시키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독일 자체도 식민지 획득에 직접 나섰다.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경영을 경멸했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이 문제로 대립하고 아프리카 분할에 나서게 되자 지상의 식민지나마 획득해 두려고 하였다.
먼저 서아프리카 연안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축전이 벌어졌다. 영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가 브라자의 조약들을 비준하자 포르투갈과 조약을 체결해 이에 맞섰다. 콩고에 관한 포르투갈의 오래된 주장들을 인정해 주는 대신에 포르투갈은 이 지역에서 영국이 자유스런 무역활동을 하도록 승인하였다.
독일 정부는 영국·프랑스 대립에서 프랑스를 지원키로 하였다. 따라서 영국·포르투갈의 조약을 겁부하고 이 문제에 관한 국제회의의 소집을 제의하였다. 독일은 동시에 식민지 획득을 추진하였다.
열강들의 아프리카 진출 방향을 크게 보면 다음과 같다. 영국은 케이프 콜로니에서는 북쪽으로, 케냐에서는 서쪽으로, 이집트에서는 남쪽으로 진출해 파쇼다로 지향하였다. 프랑스도 세네갈과 프랑스령 콩고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지부티에서는 서쪽으로 진출해 역시 파쇼다로 향하였다. 그리고 독일은 카메룬과 독일령 서남아프리카에서 콩고 자유국가 방향으로, 그리고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역시 콩고 자유국가 방향으로 팽창하였다.
베를린 회의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연안으로부터 내륙지방으로 그 세력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내륙, 특히 콩고의 전통적인 분지에 관한 열강의 이해조정과 콩고강, 니제르 강의 자유 운행에 관해 합의가 필요하였다.
독일이 이런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한 국제회의의 소집을 제의하였고 프랑스가 적극 호응해 회의가 이루어졌다. 식민지 문제에 관한 양국의 화해 무드를 반영한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웨덴, 터키, 미국과 같은 모든 주요 국가들이 참여한 최초의 식민지 관계 국제회의였다. 모든 국가들은 서로 속이고 그리고 자국이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이 유럽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회의의 목적은 콩고 분지, 콩고 강, 니제르 강 그리고 아프리카 연안에서 새로 영토를 취득하는 경우 발생할 분쟁을 토의하는 것이었다.
베를린 회의의 합의로 중앙아프리카 지역에서 열강 간의 중대한 분쟁은 당분간 사라지게 되었다.
파쇼다 사건
18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프리카 식민지쟁탈에 있어서 앞장섰던 영국과 프랑스 두 국가가 결국 정면으로 대립한 것이 바로 파쇼다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집트 경영을 위해 나일 강의 지배가 절대적이었던 영국의 이해와 지부티-가봉을 동·서로 연결하는 프랑스의 이해가 충돌한 사건이었다.
사실 양국은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대립해 왔다. 프랑스는 영국의 이집트 경영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은 또 벨기에와 교섭해 콩고의 인접지역을 조차하려고 하였다. 이 조차 계획은 독일과 프랑스의 반대에 봉착해 무산되었다.
파쇼다 사건의 정치적인 해결은 1899년 3월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캉봉을 영국으로 파견해 나일 강 유역의 모든 프랑스 주장을 포기하기로 하였고 그 대신에 쓸모 없는 사하라 지역에 관한 프랑스의 주장이 확인되었다.
2. 제국주의 세력 미국의 등장
파리 평화조약
1894년 미국은 관세인상 조치의 하나로 설탕에 비교적 높은 관세를 부과하였다. 이런 조치는 곧 쿠바 경제에 타격을 주었고 1895년에 이르러 설탕의 과잉생산으로 쿠바는 경제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스페인 지배에 항거하는 혁명운동이 쿠바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스페인 본국 정부는 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이 때 미국 정부는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전함 메인호를 1898년 1월 아바나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2월 15일 메인 호가 원인불명의 사고로 폭발하여 25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으로 전쟁결정을 주저하던 맥킨리 대통령도 4월 24일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전쟁은 장기화되지 않았다. 스페인은 이제 미국과 대적할 만한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강화회의인 파리 회의에 파견된 미국 대표들은 모두 팽창주의자들이었다. 강화회의에서 필리핀, 푸에르토리코의 할양 그리고 쿠바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회의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쿠바의 향방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은 스페인의 식민통치 종식에만 만족하였고 스페인은 미국이 할양받기를 희망하는 역설적인 주장을 하였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시정권을 갖고 있다가 1901년 6월 미국과 쿠바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어 쿠바의 법적 지위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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