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국 동맹과 3제 협상
베를린 회의 이후의 유럽
베를린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에서는 평화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런 평화는 유럽 열강들이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유럽 대륙안에서도 열강들은 전쟁을 하기보다 돈 버는 일에 너무나 혈안이었다. 영국을 제외한 열강들은 다시 보호관세 무역시대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국제교역은 비교적 자유스런 편이었고 러시아와 터키를 제외하고는 여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 체제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양국 동맹의 의의
양국 동맹은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공격에 관해서는 두 나라는 단지 우호적인 중립만 지키기로 약속했으나 프랑스가 러시아와 함께 공격을 감행한다면 물론 두 나라에게는 원조의무가 발생한다.
이 동맹은 비스마르크 체제의 기본적인 축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1873년에 구축된 제1차 비스마르크의 체제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동등한 위치에 두고 구축되었다. 그러나 1879년부터 구축되기 시작한 제2차 비스마르크 체제는 그와 같은 동등한 대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우위에 둔 동맹체제였다. 다시 말하자면 비스마르크의 동맹체제는 빈을 축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축은 두 제국이 몰락한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프랑스의 고립과 유럽 정치질서의 현상유지를 목표로 삼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외교노선은 이 동맹에 입각해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3제 협상의 의의
3제 혒방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러시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조약이다. 반면에 오스트리아는 얻은 것이 별로 없다고 불평할 만한 조약이다.
먼저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보다 해협봉쇄의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또 이협상은 오스트리아가 영국과 손을 잡지 않겠다는 러시아에 대한 정치적 약속이기도 하다.
독일은 프랑스의 고립과 유럽 정치질서의 현상유지라고 하는 외교정책의 큰 틀에 이 협상이 공헌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독일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동시에 끌어들임으로써 발칸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러시아냐 오스트리아냐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3제 협상은 세 나라의 공동목표 또는 공통이익 위에 구축된 동맹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 협상은 발칸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대립해 온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잠정적인 화해에 입각하였다. 따라서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가 발칸 이외에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동안에만 작동할 수 있었다.
2. 3국 동맹
3국 동맹 조약의 성립배경
1878년 베를린 회의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두 가지 외교노선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였다. 공화국 체제를 갖고 있는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해 트렌티노를 위시한 미수복지의 회복을 꿈꾸느냐, 아니면 베를린 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권장한 대로 해외를 진출하느냐 하는 두 가지가 그것이다.
이탈리아의 해외진출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반프랑스운동이 일어났고 6월에는 마르세유에서 프랑스 노동자와 이탈리아 노동자의 충돌사태가 일어났으며 이탈리아 데프레티스 정부가 프랑스를 정면에서 비난하고 나섰다. 이탈리아로서는 베를린, 빈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보장조약을, 오스트리아는 중립조약을 고집해 쉽게 타결이 되지 않았으나 비스마르크가 칼노키에게 이탈리아의 요구를 수락토록 종용해 5월 20일 드디어 빈에서 3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3국 동맹 조약의 의의
이 조약은 본질적으로 프랑스를 겨냥한 것이다. 조약 당사국들은 프랑스 이외의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우호중립의 의무만이 발생하지만 프랑스가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공격하면 원조의무가 발생하게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입장에서 보면 3국 동맹은 그의 외교정책 노선에 잘 부합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고립, 유럽 질서의 현상유지, 그리고 유럽 이외 지역에서의 팽창 권유라는 그의 정책노선을 3국 동맹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재정비
지중해 협정
영국의 이집트 점령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프랑스의 튀니스 점령으로 악화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관계는 관세 문제로 더욱 긴장되었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지중해 협정은 프랑스에 대한 이런 적대감정과 지중해에서 공동보조를 취해야 된다는 인식에 기초하였다. 처음 이탈리아는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경우 타국이 원조한다는 규정의 삽입을 주장했으나 영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으로 보아 이런 약속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설득으로 이탈리아는 영국의 입장을 양해하였다.
이 지중해 협정을 구성하고 있는 각서 교환들은 모두 프랑스가 가상적국으로 삼고 있으며 영국이 독일, 오스트리아와 연결하게 됐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 협정은 1892년 로즈베리가 외상이 되면서 종료되었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3국 동맹이 1887년 2월에 다시 갱신된 것도 재정비 작업의 핵심이었음은 물론이다.
4.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내재적 모순과 붕괴
비스마르크의 해임
빌헬름 2세 황제는 비스마르크에게 알리지도 않고 다른 각료들과 상의하기 시작해 비스마르크와 틈이 생기게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52년에 제정된 내각령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대립은 1890년에 종료되는 사회주의자에 관한 법령을 연장하느냐 폐기하느냐 하는 문제로 더욱 첨예화되었다.
황제와 비스마르크의 대립은 외교정책에서도 나타났다. 재보장 조약의 연장에 관한 문제가 현안이었다. 황제는 물론 그 연장에 반대하였다. 황제뿐만 아니라 많은 외교관들이 러시아에 대해 행동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1890년 초의 이런 분위기에서 황제는 비스마르크에게 1852년에 제정된 내각령의 수정을 명령하였다. 이것은 그동안 재상이 향유해 오던 특권을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그 명령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사임이 아니라 해임을 당하고 말았다. 비스마르크가 물러나면서 세계외교사에 한 시기의 구획이 그어지게 되었다. 그 두드러진 측면이 유럽 국제정치 질서의 전 세계적인 팽창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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